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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15 11页 doc 103KB 108阅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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土豆감자 감자 김동인 싸움, 간통, 살인, 도둑,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사농공상의 제이위에 드는) 농민이었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었다. 예전 선비의 엄한 규율은 농민으로 떨어지자부터 없어졌다 하나, 그러나 어딘지는 모르지만 딴 농민보다는 좀 똑똑하고 엄한 가율이 그의 집에 그냥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자라난 복녀는 물론 다른 집 처녀들같이 여름에는 벌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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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감자 김동인 싸움, 간통, 살인, 도둑,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근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사농공상의 제이위에 드는) 농민이었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었다. 예전 선비의 엄한 규율은 농민으로 떨어지자부터 없어졌다 하나, 그러나 어딘지는 모르지만 딴 농민보다는 좀 똑똑하고 엄한 가율이 그의 집에 그냥 남아 있었다. 그 가운데서 자라난 복녀는 물론 다른 집 처녀들같이 여름에는 벌거벗고 개울에서 멱감고, 바짓바람으로 동네를 돌아다니는 것을 예사로 알기는 알았지만, 그러나 그의 마음 속에는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기품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열 다섯 나던 해에 동네 홀아비에게 팔십 원에 팔려서 시집이라는 것을 갔다. 그의 새 서방(영감이라는 편이 적당할까)이라는 사람은 그보다 이십 년이나 위로서, 원래 아버지의 시대에는 상당한 농민으로 밭도 몇 마지기나 있었으나 그의 대로 내려오면서는 하나 둘 줄기 시작하여서 마지막에 복녀를 산 팔십 원이 그의 마지막 재산이었다. 그는 극도로 게으른 사람이었다. 동네 노인의 주선으로 소작밭깨나 얻어 주면 종자만 뿌려 둔 뒤에는 후치질도 안하고 김도 안 매고 그냥 버려두었다가 가을에 와서는 되는대로 거둬서 '금년엔 흉년입네.'하고 전줏집에는 가져도 안가고 혼자 먹어 버리곤 하였다. 이리하여 몇 해를 지내는 동안 그는 그 동네에서는 밭을 못 얻으리만큼 인심과 신용을 잃고 말았다. 복녀가 시집을 온 지 삼사 년은 장인의 덕으로 이렁저렁 지내 갔으나 예전 선비의 꼬리인 장인도 차차 사위를 밉게 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처가에까지 신용을 잃게 되었다. 그들 부처는 여러 가지로 의논하다가 하릴없이 평양 성안으로 막벌이로 들어왔다. 그러나 게으른 그에게는 막벌이나마 역시 되지 않았다. 하루종일 지게를 지고 연광정에 가서 대동강만 내려다보고 있으니, 어찌 막벌이인들 될까. 한 서너 달 막벌이를 하다가 그들은 요행 어떤 집 막간(행랑)살이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에서도 얼마 안되어 쫓겨 나왔다. 복녀는 부지런히 주인집 일을 보았지만 남편의 게으름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만날 복녀는 눈에 칼을 세워 가지고 남편을 채근하였지만 그의 게으른 버릇은 개를 줄 수는 없었다. "벳섬 좀 치워 달라우요." "남 졸음 오는데, 님자 치우시관." "내가 치우나요?" "이십 년이나 밥을 처먹고 그걸 못 치워?" "에이구 칵 죽구나 말디." "이년 뭘!" 이러한 싸움이 그치지 않다가 마침내 그 집에서도 쫓겨 나왔다. 이젠 어디로 가나? 그들은 하릴없이 칠성문 밖 빈민굴로 밀리어 나오게 되었다. 칠성문 밖을 한 부락으로 삼고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의 정업은 거지요, 부업으로는 도둑질과 (자기네들끼리의)매음, 그밖에 이 세상의 모든 무섭고 더러운 죄악이었다. 복녀도 그 정업으로 나섰다. 그러나 열 아홉 살의 한창 좋은 나이의 여편네에게는 누가 밥인들 잘 줄까. "젊은 거이 거랑질은 왜?"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여러 가지 말로 남편이 병으로 죽어가거니 어쩌느니 핑계는 대었지만, 그런 핑계에는 단련된 평양 시민의 동정은 역시 살 수가 없었다. 그들은 이 칠성문 밖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 가운데 드는 편이었다. 그 가운데서 잘 수입되는 사람은 하루에 오리 짜리 돈푼으로 일 원 칠팔십 전의 현금을 쥐고 돌아오는 사람까지 있었다. 극단으로 나가서는 밤에 돈벌이를 나갔던 사람은 그날 밤 사십 원을 벌어 가지고 그 근처에서 담배장사를 하기 시작한 사람까지 있었다. 복녀는 열 아홉 살이었다. 얼굴도 그만하면 빤빤하였다. 그 동네 여인들의 보통 하는 일을 본받아서, 그도 돈벌이 좀 잘하는 사람의 집에라도 간간 찾아가면 매일 오륙십 전은 벌 수가 있었지만 선비의 집안에서 자라난 그는 그런 일은 할 수가 없었다. 그들 부처는 역시 가난하게 지냈다. 굶는 일도 흔히 있었다. 기자묘 솔밭에 송충이가 끓었다. 그때 평양부에서는 그 송충이를 잡는데(은혜를 베푸는 뜻으로)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을 인부로 쓰게 되었다. 빈민굴 여인들은 모두가 지원을 하였다. 그러나 뽑힌 것은 겨우 오십 명쯤 되었다. 복녀도 그 뽑힌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복녀는 열심으로 송충이를 잡았다. 소나무에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서는 송충이를 집게로 집어서 약물에 집어넣고 또 그렇게 하고, 그의 통은 잠깐 새에 차곤 하였다. 하루에 삼십이 전씩의 품삯이 그의 손에 들어왔다. 그러나 대엿새 하는 동안에 그는 이상한 현상을 하나 발견하였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젊은 여인부 한 여남은 사람은 언제든 송충이는 안 잡고 아래서 지절거리며 웃고 날뛰기만 하고 있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놀고 있는 인부의 품삯은 일하는 삯전보다 팔 전이나 더 많이 내어주는 것이었다. 감독한 한 사람뿐이었는데, 감독도 그들이 놀고 있는 것을 묵인할 뿐 아니라 때때로는 자기까지 섞여서 놀고 있었다. 어떤 날 송충이를 잡다가 점심때가 되어서 나무에서 내려와서 점심을 먹고, 다시 올라가려 할 때에 감독이 그를 찾았다. "복네! 얘, 복네!" "왜 그릅네까?" 그는 약통과 집게를 놓고 뒤로 돌아섰다. "얘, 너, 음????데 뒤 좀 가 보자." "뭘 하레요?" "글쎄 가자????." "가디요. 형님!" 그는 돌아서면서 인부들 모여 있는 데로 고함쳤다. "형님두 갑세다." "싫다 얘, 둘이서 재미있게 가는데 내가 무슨 맛에 가갔니?" 복녀는 얼굴이 새빨갛게 되면서 감독에게로 돌아섰다. "가 보자." 감독은 저편으로 갔다. 복녀는 머리를 숙이고 따라갔다. "복네 좋갔구나." 뒤에서 이런 소리가 들렸다. 복녀의 숙인 얼굴은 더욱 빨갛게 되었다. 그날부터 복녀도 '일 안하고 품삯 많이 받는 인부'의 한 사람으로 되었다. 복녀의 도덕관 내지 인생관은 그때부터 변하였다. 그는 여태껏 딴 사내와 관계를 한다는 것은 생각하여 본 일도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요, 짐승의 하는 것쯤으로만 알고 있었다. 혹은 그런 일을 하면 탁 죽어지는지도 모를 일로 알았다. 그러나 이런 이상한 일이 어디 다시 있을까. 사람인 자기도 그런 일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결코 사람으로 못할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일 안하고도 돈 더 받고, 긴장된 유쾌가 있고, 빌어먹는 것보다 점잖고????. 일본 말로 하자면 '삼박자(三拍子)'같은 좋은 일은 이것뿐이었다. 이거야말로 삶의 비결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이 일이 있은 뒤부터 그는 처음으로 한 개 사람으로 된 것 같은 자신까지 얻었다. 그 뒤로부터는 그의 얼굴에 조금씩 분도 발리게 되었다. 일년이 지났다. 그의 처세의 비결은 더욱 더 순탄히 진척되었다. 그의 부처는 인제는 그리 궁하게 지내지는 않게 되었다. 그의 남편은 이것이 결국 좋은 일이라는 듯이 아랫목에 누워서 벌씬벌씬 웃고 있었다. 복녀의 얼굴은 더욱 예뻐졌다. "여보 아즈바니, 오늘은 얼마나 벌었소?" 복녀는 돈 좀 많이 벌은 듯한 거지를 보면 이렇게 찾는다. "오늘은 많이 못 벌었쉐다." "얼마?" "도무지 열 서너 냥." "많이 벌었쉐다 그래. 한 댓 냥 꿰 주소고래." "오늘은 내가????." 어쩌고 어쩌고 하면 복녀는 곧 뛰어가서 그의 팔에 늘어진다. "나한테 들킨 댐에는 뀌고야 말아요." "난, 원, 이 아즈마니 만나믄 야단이더라. 자 꿰주디, 그대신 응? 알아있디?" "난 몰라요 해해해해." "모르믄 안 줄 테야." "글쎄 알았대두 그른다." ―― 그의 성격은 이만큼 까지 진보되었다. 가을이 되었다.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들은 가을이 되면 칠성문 밖에 있는 중국인의 채마 밭에 감자(고구마)며 배추를 도둑질하러 밤에 바구니를 가지고 간다. 복녀도 감자깨나 잘 도둑질하여 왔다. 어떤 날 밤 그는 고구마를 한 바구니 잘 도둑질하여 가지고 이젠 돌아가려고 일어설 때에 그의 뒤에 시꺼먼 그림자가 서서 그를 꽉 붙들었다. 보니 그것은 밭의 주인인 중국인 왕 서방이었다. 복녀는 말도 못하고 멀찐멀찐 발 아래만 보고 있었다. "우리집에 가!" 왕 서방은 이렇게 말하였다. "가재문 가디, 원 것두 못 갈까." 복녀는 엉덩이를 한 번 획 두른 뒤에 머리를 젖히고 바구니를 저으면서 왕 서방을 따라갔다. 한 시간쯤 뒤에 그는 왕 서방의 집에서 나왔다. 그가 밭고랑에서 길로 들어서려 할 때 문득 뒤에서 누가 그를 찾았다. "복네 아니야?" 복녀는 획 돌아서 보았다. 거기는 곁집 여편네가 바구니를 기고 어두운 밭고랑을 더듬더듬 나오고 있었다. "형님이댔쉐까???? 형님도 들어갔댔쉐까?" "님자도 들어갔댔나?" "형님은 뉘 집에?" "나? 눅(陸)서방네 집에, 님자는?" "난 왕 서방네???? 형님 얼마 받았소?" "눅서방네 그 깍쟁이놈 배추 세 패기????." "난 삼 원 받았다." 복녀는 자랑스러운 듯이 대답하였다. 십 분쯤 뒤에 그는 자기 남편과 그 앞에 돈 삼 원을 내놓은 뒤에 아까 그 왕 서방의 이야기를 하면서 웃고 있었다. 그 뒤부터 왕 서방은 무시로 복녀를 찾아왔다. 한참 왕 서방이 눈만 멀찐멀찐 앉아 있으면 복녀의 남편은 눈치를 채고 밖으로 나간다. 왕 서방이 돌아간 뒤에는 그들 부처는 일원 혹은 이 원을 가운데 놓고 기뻐하곤 하였다. 복녀는 차차 동네 거지들한테 애교를 파는 것을 중지하였다. 왕 서방이 분주하여 못 올 때가 있으면 복녀는 스스로 왕 서방의 집까지 찾아갈 때도 있었다. 복녀의 부처는 이젠 이 빈민굴의 한 부자였다. 그 겨울도 가고 봄이 이르렀다. 그때 왕 서방은 돈 백 원으로 어떤 처녀를 하나 마누라로 사오게 되었다. "흥." 복녀는 다만 코웃음만 쳤다. "복네 강짜하갔구만." 동네 여편네들이 이런 말을 하면 복녀는 '흥'하고 코웃음을 웃고 하였다. 내가 강짜를 해? 그는 늘 힘있게 부인하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마음에 생기는 검은 그림자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놈 왕 서방, 네 두고 보자." 왕 서방이 색시를 데려오는 날이 가까워 왔다. 왕 서방은 여태껏 자랑하던 기다란 머리를 깎았다. 동시에 그것은 새색시의 의견이라는 소문이 퍼졌다. "흥." 복녀는 역시 코웃음만 쳤다. 마침내 새색시가 오는 날이 이르렀다. 칠보단장에 사린교를 탄 색시가 칠성문 밖 채마밭 가운데 있는 왕 서방의 집에 이르렀다. 밤이 깊도록 왕 서방의 집에는 중국인들이 모여서 별난 악기를 뜯으며 별난 곡조로 노래하며 야단하였다. 복녀는 집 모퉁이에 숨어 서서 눈에 살기를 띠고 방안의 동정을 듣고 있었다. 다른 중국인들은 새벽 두 시쯤 하여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복녀는 왕 서방의 집안에 들어갔다. 복녀의 얼굴에는 분이 하얗게 발리어 있었다. 신랑 신부는 놀라서 그를 쳐다보았다. 그것을 무서운 눈으로 흘겨 보면서 그는 왕 서방에게 가서 팔을 잡고 늘어졌다. 그의 입에서는 이상한 웃음이 흘렀다. "자, 우리 집으로 가요." 왕 서방은 아무 말도 못하였다. 눈만 정처없이 두룩두룩하였다. 복녀는 다시 한 번 왕 서방을 흔들었다. "자, 어서." "우리, 오늘밤 일이 있어 못 가." "일은 밤중에 무슨 일." "그래두, 우리 일이????." 복녀의 입에 여태껏 떠돌던 이상한 웃음이 문득 없어졌다. "이까짓것!" 그는 발들 들어서 치장한 신부의 머리를 찼다. "자, 가자우, 가자우." 왕 서방은 와들와들 떨었다. 왕 서방은 복녀의 손을 뿌리쳤다. 복녀는 쓰러졌다. 그러나 곧 일어섰다. 그가 다시 일어설 때는 그의 손에 얼른얼른하는 낫이 한 자루 들리어 있었다. "이 되놈 죽어라, 이놈, 나 때렸다! 이놈아, 아이구 사람 죽이누나." 그의 목을 놓고 처울면서 낫을 휘둘렀다. 칠성문 밖 외따른 밭 가운데 홀로 서 있는 왕 서방의 집에서는 일장 활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활극도 곧 잠잠하게 되었다. 복녀의 손에 들리어 있던 낫은 어느덧 왕 서방의 손으로 넘어가고 복녀는 목으로 피를 쏟으며 그 자리에 고꾸라져 있었다. 복녀의 송장은 사흘이 지나도록 무덤으로 못 갔다. 왕 서방은 몇 번을 복녀의 남편을 찾아갔다. 복녀의 남편도 때때로 왕 서방을 찾아갔다. 그들의 사이에는 무슨 교섭하는 일이 있었다. 사흘이 지났다. 밤중 복녀의 시체는 왕 서방의 집에서 남편의 집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시체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 서방, 또 한 사람은 어떤 한방 의사(漢方醫師). 왕 서방은 말없이 돈주머니를 꺼내어 십 원짜리 지폐 석 장을 복녀의 남편에게 주었다. 한방 의사의 손에도 십 원짜리 두 장이 갔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사의 진단으로 공동묘지로 실려 갔다.                     〈1925年〉 【文章鉴赏】 줄거리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출원지인 이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의 부처는 (사농공상의 2위에 드는) 농민이었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다. 농부의 딸인 복녀는 돈에 팔려 나이가 저보다 스무 살이나 더 되는 홀아비에게 시집을 갔다. 생활은 말이 아닌데다 남편은 게을러서, 기어코 평양 교외의 빈민굴로 밀려나와 구걸로써 목숨을 이어 가게 되었다. 마침, 그 때 솔밭에 송충이가 뒤끓어 평양부에서는 송충이 퇴치에 나섰다. 복녀도 그 인부의 한 사람으로 뽑혔다. 복녀는 열심히 송충이를 잡았다. 어떤 날 그녀는 몇몇 아낙네들이 감독과 더불어 웃고 놀며 소일하면서, 품삯은 자기보다 훨씬 더 많이 받는 것을 발견했다. 얼마 되지 않아 복녀도 감독에게 몸을 더럽히게 되었으며, 그 날부터 다른 아낙네처럼 놀아날 수가 있게 되었고, 정조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 가을이 닥쳐왔을 때 복녀는 빈민굴 아낙네들을 본받아, 이번에는 중국인 감자밭에 감자를 도둑질하기 위해 드나들기 시작했다. 어떤 밤이었다. 그녀는 감자 한 광주리를 훔쳐서 막 일어나려는 찰나 중국인 왕 서방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복녀는 중국인을 따라가서 몸을 허락하고 얼마간의 돈을 얻어 돌아왔다. 그 후부터 그녀의 집에까지 왕 서방은 드나들게 되었다. 그들 부부의 생활에는 약간 윤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복녀의 집에 왕 서방이 오면 복녀의 남편은 복녀가 마음놓고 몸을 팔 수 있도록  자리를 피해주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인 왕 서방이 장가를 들게 되었다. 새로 색시를 사온 것이다. 복녀는 타오르는 질투를 참지 못해서 왕 서방을 찾아가서 저의 집으로 가기를 청했다. 복녀는 손에 낫을 쥐고 대항하다가 오히려 왕 서방에게 낫으로 찔려서 죽었다.  이 날 밤 시체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한 사람은 복녀의 남편, 한 사람은 왕 서방, 또 한 사람은 한방 의사였다. 왕 서방은 복녀의 남편과 의사에게 각각 30원과 20원씩을 주었다.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사의 진단으로 공동 묘지로 실려 갔다.   ▣ 핵심 정리  갈래 : 단편 소설. 본격 소설  배경 : 시간(1920년대). 공간(평양 칠성문 밖 빈민굴)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문체 : 간결체  경향 : 자연주의적 경향  표현 : 사실주의적 기법  구성 :     발단 - 온갖 죄악의 소굴인 칠성문 밖 빈민굴의 복녀     전개 - 복녀에게 닥쳐온 환경의 변화와 점진적인 타락. '성(性)'에 눈 뜸     위기 - 새장가를 드는 왕 서방에 대한 강한 질투     절정 - 복녀가 왕 서방의 신방에 뛰어드나 도리어 자신의 낫에 살해당함     결말 - 복녀의 주검을 둘러싼 비정의 돈 거래  주제 : 불우한 환경이 빚어낸 한 여인의 운명적 비극  출전 : <조선문단>(1925)   ▣ 등장 인물  복녀 : 이 소설의 비극적 주인공이다. 어렸을 때에는 가난했지만 도덕적 기품을 잃지 않았던 그녀가 생활 환경이 변하자 점점 타락해 간다.    왕 서방 : 돈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부자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복녀의 몸을 탐할 때에도 돈으로 해결을 했고, 후에 색시도 돈으로 사오게 된다. 또, 자신이 복녀를 죽이자 한방 의사와 복녀의 남편에게 돈을 주고서 사실을 은폐하려 한다. 이 시대의 부유층을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복녀 남편 : 게으르고 생활력이 없는 사람이다. 복녀가 왕서방에게 몸을 팔고 돈을 얻을 때도 자신의 부인을 보호하려고 하지는 않고 오히려 자리를 피해 주었다. 또, 복녀가 죽었을 때에도 돈을 받고 사실을 숨겨 준다. 시대의 낙오자이다.   ▣ 감상  이 작품은 "태형", "명문" 등과 함께 자연주의 경향의 소설로 소설가로서의 김동인의 위치를 확고히 해 준 작품이다. 감자는 복녀라는 가난하지만 정직한 농가에서 자란 여인이 환경의 영향을 받아 타락해 가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이른바 자연주의의 특징인 환경 결정론에 입각한 작품이다. 환경 결정론이란 주인공의 운명은 환경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이론이다. 복녀의 죽음도 따지고 보면 불우한 환경이 빚어낸 일종의 숙명으로, 그 운명은 환경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이다. 그녀의 최초의 부정은 타율적인 것이었지만 나중에는 자율적인 것으로 변화된다.  "싸움, 간통, 살인, 도적, 구걸, 징역, 이 세상의 모든 비극과 활극의 출원지인, 칠성문 밖 빈민굴로 오기 전까지는 복녀(福女)의 부처는 (사농공상의 제2위에 드는) 농민이었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쳐녀였었다."  복녀는 가난하지마 정직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예의 바르고 착하게 자라난다. 그러나 열다섯 살 되던 해에 돈에 팔려서 시집을 가게 되는데, 서방이 이십 년이나 위일 뿐만 아니라 게으르고 무능하였다. 그리하여 거지 행각과 허드렛일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 기자묘 솔밭에 송충이가 들끓자 평양부에서는 칠성문 밖 빈민굴의 여인을 동원하게 된다. 복녀는 하루 삼십이 전 벌이의 송충이 잡이에 참여하는데, 우연히 감독에게 몸을 팔고 '일 안하고 공전(공돈) 많이 받는 인부'의 한 사람이 된다.  "복녀의 도덕관 내지 인생관은, 그 때부터 변하였다.  그는 아직껏 딴 사내와 관계를 한다는 것을 생각하여 본 일이 없었다. 그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요, 짐승의 하는 짓으로만 알고 있었다. 혹은 그런 일을 하면 탁 죽어지는지도 모를 일로 알았다.  그러나 이상한 일이 어디 다시 있을까. 사람인 자기도 그런 일을 한 것을 보면, 그것은 결코 사람으로 못할 일이 아니었었다."  복녀는 점점 더 몸을 파는 일에 빠져 든다. 가을이 되어 칠성문 밖 지나인(중국인)의 채마밭에서 감자를 도둑질하다가 주인 왕서방에게 들키지만 복녀는 용서의 대가로 왕서방에게 몸을 허락한다. 그 뒤 왕서방과의 관계는 남편의 묵인 아래 계속된다. 그러나 이들의 관계는 봄이 되어 왕서방이 다른 처녀와 결혼하면서 깨지게 된다. 복녀는 질투심 때문에 왕서방의 혼례가 있던 날 밤 왕서방의 집에 쳐들어가지만 왕서방에게 살해당하고 만다. 사흘이 지난 밤중에 복녀의 시신을 둘러싸고 왕서방과 복녀의 남편과 한방의,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있다. 왕서방은 복녀의 남편과 한방의에게 돈을 건네고 이튿날 복녀는 뇌일혈로 죽었다는 한방의의 진단으로 공동묘지에 묻힌다.  복녀의 비참한 죽음으로 끝나는 이 작품은 언뜻 수탈 당하는 하층 계급 사람들의 비극을 폭로하는 계급 의식과 관련지어 읽을 수도 있다. 또 외국인에 의한 복녀의 죽음은 민족 의식과 연관시킬 수도 있다.  그러나 <감자>의 본질은 그 어느 쪽도 아니다. 복녀가 빈민굴의 주민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계급 차별의 결과가 아니다. 농민의 딸이었던 복녀가 빈민굴의 주민으로 전락하게 된 것은 남편의 무능 때문이었다. 남편도 자기 아버지의 대에는 상당한 농민이었다. 또한 민족 의식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감자>에서는 일본인이 아닌 '되놈'인 왕서방이 등장할 뿐이다. 복녀가 죽게 되는 장면에서도 먼저 살의를 품은 것은 복녀였다.  <감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가난이라는 물질적 조건, 즉 환경이 인간의 타락에 어떤 위력을 발휘하는가이다. "복녀는, 원래 가난은 하나마 정직한 농가에서, 규칙 있게 자라난 처녀였었다." 그녀의 마음속에서는 "막연하나마 도덕이라는 것에 대한 저픔(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결혼 이후 몰락의 과정을 겪으면서 점점 성격도 변해 간다. 그리고 기자묘의 송충이잡이에 참여하였다가 일어난 '일 안하고 공전 많이 받는 인부'의 한 사람이 되는 사건을 겪게 된 뒤에는 도덕관 내지 인생관이 바뀌고야 만다. 그리고 왕서방네 감자를 훔치면서 그와 관계를 맺게 된 뒤부터는 그 파렴치의 도를 더해 간다. "왕서방이 분주하여 못 올 때가 있으면 복녀는 스스로 왕서방의 집까지 찾아갈 때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타락의 길을 걷던 복녀가 죽음을 맞게 되지만 남편은 그녀의 시체를 놓고 왕서방과 흥정을 한다. 그 '감자'라는 물질이 어떻게 인간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고 인간을 타락의 길로 나서게 만드는가에 작가는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모두 아홉 개의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 단편 속에 '복녀'라는 한 여인의 삶이 농축되어 있는 이 작품의 특징은 우선 그 간결한 문장과 압축적인 대화가 눈에 띈다. 그리고 작가의 주관적인 설명이나 해석이 없이 객관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냉철한 문체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내용 면에서는 환경결정론에 입각한 김동인 특유의 자연주의적인 시각이 잘 드러나고 있다.   ▣ 작가 소개  김동인 (金東仁 1900-1951년) 소설가. 호는 금동(琴童). 일본에 메이지 학원 중학부 졸업. 가와바타 미술학교 중퇴. 1919년 주요한 , 전영택 등과 함께 한국 현대 문학 사상 최초의 문예 동인지 <창조> 창간. 1호와 2호에 "약한 자의 슬픔" 게재. 이광수 등의 설교조 계몽주의 소설을 극복하고 본격적인 근대 소설인 사실주의를 표방하고 나섰다. 자연주의 작가. 사실주의 작가. 예술지상주의 작가라는 평을 받는다. 문학사적 업적은, 첫째 진정한 자연주의 경향의 문학을 확립. 둘째 본격적인 단편소설에 기반을 세움. 셋째 유머와 위트 파라독스를 단일한 구성 속에 도입했으며, 넷째 문장을 혁신했다는 점이다.    김동인은 문학에서 계몽적 교훈주의를 배척하고 문학 자체의 아름다움을 지키려는 독특한 양식을 이룬 작가이다. 간결하고 직선적인 서술 문체와 형식적 완결성이 잘 드러나는 순문학 지향의 단편소설을 많이 창작하였는데, 대표작으로는 "배따라기", "감자", "광염(狂炎) 소나타", "광화사(狂畵師)" 등이 있으며, 장편소설인 "젊은 그들", "운현궁의 봄" 등은 역사로부터의 교훈보다 인물의 개성을 살리는 묘사와 허구 등에 중점을 둔 역사소설로서 인정받고 있다. 사실주의적 문체의 확립, 서사적 과거시제, 액자 소설적인 시점의 이동에 의한 객관적 기법 등 한국 근대 소설 미학의 기법 면에서 이룩한 공적이 큰 작가이다. 6·25 때 서울에서 병사(病死)했다.       <참고> '김동인'에 대해서 □ 연구론  지금까지 김동인과 관계하여 전개되어 온 연구 성과를 개관해 보면, 작가론 특히 작가의 전기를 토대로 해서 쓰여진 대부분의 작가론은 전기의 조사 , 연구 , 방법론의 미흡 등으로 인해 초기의 수준에서 큰 진전을 보이지 못하고 있으며. 작품론에 있어서는 우선 양적으로도 풍성할 뿐 아니라 분석주의 혹은 구조주의적 텍스트 분석방법의 활용에 따라 최근 무게 있는 논문들이 발표되어 왔다. 또한 비교문학적 연구와 비평에 관한 연구도 양적으로 빈약한 편이지만 구체적인 성과를 보여 주고 있다. 근년에 들어 일부 비평가들의 평론에 의해 김동인에 대한 비판 내지 부정론이 두드러지게 제기되어 왔다. 이는 주로 김동인의 역사 내지 민족의식을 부정적인 시각에서만 비판하고 있다. 김동인의 작가의식에 관한 연구는 그와 그의 문학에 대한 보다 실증적, 분석적인 연구 성과를 토대로 보완할 필요가 있다. □ 작품 성향  김동인의 문학적 경력은 1919년부터 시작된다. [창조]를 발간하면서 처녀작 '약한자의 슬픔'을 발표한다. 1920년에는 그는 단편 '피아노의 울림',중편 '마음이 옅은 자여'를 발표하며, 문학비평가의 역할의 문제를 에워싸고 염상섭과 논쟁을 벌인다. 1921년에는 그의 대표적 단편의 하나로 쾌락주의적 인생관을 바탕으로 한 탐미주의 사상을 표현한 '배따라기'를 발표하는 외에 '목숨', '전제자' 등을 발표한다. 1923년에는 단편 '이 잔을',등을 발표한다. 특히 '이 잔을'은 예수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로 그의 기독교에 대한 관심과 태도를 보여주는 이색적인 작풍이다. 1924년 그른 창조의 후신인 '영대'를 간행하며 단편 '유서', '거치른 터'등을 발표한다.1925년에는 단편 '정희', '명문', '감자', '시골 황서방','눈보라'등 그의 자연주의적 인생관을 짙게 반영하고 있는 일련의 작품들을 발표한다. 1929년경부터는 단편 '광염 소나타', '송동이', 'K 박사의 연구'와 그의 최초의 장편인 '젊은 그들'등을 발표한다. 1930년에는 단편 '죄와 벌', '증거', '순정', '구두', '포플러', '신앙으로', '여인', '뺏기운 대금업자'등을 1931년에는 '발가락이 닮았다', '거지', '대수양'등을 1932년에는 단편 '붉은 산',   '적막한 저녁', '장편 '아기네'등이 있다. 이중 '신앙으로'는 극심한 삶의 시련을 겪은 후의 그의 신앙에 대한 긍정적 태도가 엿보이는 작품이며 '붉은 산'은 그의 민족의식을 보여주고 있는 작품이다. 그후 얼마간의 작품 생활을 하다가 1951년 동란의 와중에서 병사했다. □ 문학적 특성  김동인은 이광수와 더불어 한국 근대소설의 개척자요 선구자였다. 김동인은 한국 최초의 순문예지 창造를 창간하고 이를 통하여 5가지 분야를 개척했다고 조연현은 말한다. 첫째는 구어체 문장을 확립하고 둘째는 구체적 문예운동을 전개하고 셋째는 계몽주의를 거부하고 순문학 정신 및 근대 사실주의를 도입하고 넷째는 근대적 단편소설을 개척하고 다섯째는 근대적 문예비평을 개척했다는 점을 들었다. 그리고 김동인은 자신의 소설에서 구어체 문장의 확립을 위해 노력하였다고 주장하며 그 구체적 특징으로 첫째는 '-더라', '-이라'등의 구투에서 탈피. 둘째는 현재법 서사체에서 과거법 서사체로 개혁. 셋째는 대명사 '그'의 사용. 넷째는 사투리의 처음 사용 등을 주장하고 있다. 조연현은 김동인이 주장하는 바와 같은 이러한 계몽주의에의 거부가 사조상으로는 사실주의를 조성시키는 방향이 되었고 근대소설의 확립과 함께 문학의 기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기술하지만 일부 학자들은 김동인도 계몽기의 문학의 넓은 테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김동인의 문학사적 공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근대적 단편소설을 처음으로 개척했다는 점이다. 그의 '배따라기'는 근대 단편소설로서의 기본적 형태를 구비한 한국 소설사상 단편소설의 최초의 한 규범을 보여준 작풍이었다. 김동인의 또 하나의 중요한 공적은 그가 근대적인 문학비평을 개척했다는 점이다. 전대 혹은 이광수의 목적문학에 반대. 문학의 예술성과 구조를 논하는 형식주의적 비평의 길을 개척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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